진정한 친구는 서로 숨기는 것이 없다. 친구에겐 깊은 속마음까지 다 털어놓을 수 있다. 한 피를 이어받은 형제를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친구를 위해 사지마저, 죽을 지경의 매우 위험하고 위태한 곳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있다. 놀랍게도 그렇게 우리 친구가 된 그분은 자기가 아는 성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자기 속에 품은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조금도 남김없이 송두리째 쏟아 준다. 게다가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마저 아까워하시지 않는다. 이처럼 죽음마저 불사한 친구이기에 그 친구의 우정과 신의는 늘 한결같다. 그 좋은 친구의 이름은 바로 ‘예수, 예수 그리스도’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고서야 장애우의 아픔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남편이나 아내와 사별한 뒤에야 홀로 사는 사람의 외로움과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이렇게 똑같은 입장에 서봐야 이해를 진정으로 공유할 수 있다. 심리학 용어로 ‘공감적 이해’라고 한다. 사람이 개를 자식처럼 사랑할 순 있다. 하지만 개에 대해 공감적 이해를 가질 순 없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명견이라 해도 개 역시 사람에 대한 공감적 이해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고뇌가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 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개는 항상 개일 뿐, 개 역시 사람이 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다. 인간의 온갖 애환을 몸소 겪으신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공감적 이해가 가능하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 우리를 참으로 도와주신다. 예수님은 짐승의 우리에서, 짐승의 밥통을 침대 삼으셔서 이 땅에 태어나신다. 사실 거지의 자식도 그보다는 더 나은 환경에서 태어난다. 가장 비천하게 태어나신 예수님이라 이 세상에서 비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신다. 그들을 공감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달동네에서 가난한 목수로 사신다. 그분의 고객은 거의 다 빈민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공감적 친구가 되신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는 쓰라림을 겪으신다. 따라서 믿었던 사람의 배신과 그 실패로 몸서리치는 사람의 진정한 친구가 되신다. 죄 없이 벌받으신 예수님이라 억울하게 모함당하는 사람의 고통까지 다 아신다.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죄인처럼 형벌 받으신 예수님이라 죄의 두려움에 떠는 자의 마음을 헤아리신다. 더욱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보다 더 높은 자는 없다. 천하 제왕도 하나님의 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이라 높고 부유한 자도 공감적으로 이해하신다. 원래 높은 사람에겐 남보다 높아서 피할 수 없는 고독과 아픔이 무겁다. 부유한 자는 남보다 가진 것이 많기에 져야 하는 짐과 부담이 크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예수님이 그들의 친구가 되신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죽음을 경험하신 뒤 그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인간의 처지를 공감적으로 이해하신다. 우리를 향해 영원한 생명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우리 친구이다. 그 친구를 믿고 따라, 그 친구와 더불어 인생길을 걸어가자.
댓글